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SX-3 제해호 (문단 편집) == 개발 == [[해취호]]와 [[SX-1 서해호|서해호]]를 만든 [[조경연]] [[소령]]은 새로운 항공기를 만들기 위해 한동안 [[설악산]] 인근을 헤매고 다녔다. 전쟁 중에 설악산에 미군 비행기들이 많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추락한 항공기의 부품을 구하러 다닌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해군]]은 [[조경연]] 소령의 비행기 제작에 적극적인 지원을 했지만, 나라가 가난해서 예산을 충분히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 소령은 발품을 팔 수 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이미 전방 지역의 추락 항공기들은 [[고물상]]들이 잽싸게 [[득템]]해간 터라 별 소득이 없었고, 이에 조 소령은 [[공항/목록/대한민국#s-6|춘천]]의 [[육군항공대]]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추락한 [[세스나 170#s-2|L-19]]의 엔진 4개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이 4개의 엔진으로 [[조경연]] 소령은 제해호와 [[http://cfs7.blog.daum.net/image/9/blog/2007/10/09/17/37/470b3dc4a2475&filename=1sx-5.jpg|SX-5 통해호]]를 제작했다. 제해호는 이제까지 해군에서 제작한 비행기 중 가장 큰 기체였다. 6명까지 탑승 가능한 중형 항공기였고, 무기도 탑재하여 공격할 수 있었다. 특히나 제해호는 엔진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품을 해군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기체라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1957년 3월, 제해호는 [[조경연]] 소령과 정학윤 중위가 실시한 테스트 비행에서 성공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해군은 1957년 4월 7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발표했고 그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제해호로 명명되었다. 그후 그해 7월에 첫 항공부대인 [[http://cfs9.blog.daum.net/image/34/blog/2007/10/09/17/48/470b40530f183&filename=1pic7.jpg|함대항공대를 창설]]했다. 해군함대항공대에 소속된 제해호는 남해안 일대 해상 감시, 함정 엄호, 대공 훈련 지원, 함포 탄착 수정, 긴급 수송 등등 본격적인 함대 작전에 참여하였다. 해군은 57년 말까지 10명의 파일럿과 22명의 정비사를 확보했고, 다음해 1958년에는 해군과학연구소가 동형의 기체를 추가로 4대 제작해 도입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군이 해군함대항공대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빈국이었던 한국은 국방비와 관련 물자의 상당 부분을 미군으로 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미 [[군사 고문단]]은 미국이 인정한 무기체계가 아닌 독자적인 해군의 항공기들에 대해서 [[병참]] 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자국에서 빌려준 거라면 나중에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관리 지원을 해줄 수 있는데, 한국의 국산 항공기들은 그런 점에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해군은 보유하던 항공기를 [[대한민국 해양경찰청|해경]]에 이관하였고, 항공기를 상실한 [[해군항공사령부|해군함대항공대]]도 결국 63년 1월에 해체되었다. 항공기 이관 후 그 운용에 필요한 상당수의 해군 항공대 인원이 해양경찰로 이동하였고, 한국 항공사에 작지만 거대한 족적을 남긴 조경연 중령도 군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